소주 소개

 

수조우(蘇州)소개


수조우는 2500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깊은 도시이다. 또한 풍경이 수려한 여행 성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인간의 천당" 이라고 불렀다. 그의 절세의 풍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예술조예가 높은 고전원림(古典園林)이 전 시내를 덮고 있으며, 천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고탑(古塔), 고시(古詩), 고묘(古廟)등은 더욱 다채로운 인문경관(人文景觀)을 펼쳐 주고 있다. 소주의 실크, 수(繡), 공예품은 유명하며, 현란하고 다채로워 그 아름다움을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지리적 위치
수조우는 장수성(江蘇省)동남부의 장장(長江) 삼각주 평원에 자리잡고 있음. 동경 120.36도, 북위 31.19도, 동쪽으로는 상하이와 잇닿아 있고, 서쪽에는 타이후(太湖)가 있음. 북으로는 장장(長江)과 인접되어 있고, 남으로는 저장(浙江)과 접해 있다. 후닝 철로와 고속도로가 동서방향으로 가로 질러 있으며, 징항(京杭) 대운하가 남북으로 통해 있다. 면적 66만㎢ (시내 면적은 8,488 ㎢ 임)


행정구역      
6개 구(區), 6개 시(市)로 구성 됨
1) 6개 구(구) : 핑장취(平江區), 창랑취(滄浪區), 진창취, 신취(新區), 공에위엔취(工業園區)
2) 6개 시(시) : 창수스(常熟市), 장쟈강스(張家港市), 쿤산스(昆山市), 우시엔스(吳縣市), 우장스(吳江市), 타이창시(太倉市)

 
인구와 민족
1) 인구 : 시 전체인구 600만 명, 시내 인구 100만 명
2) 민족 : 한족(漢族), 몽골족(蒙古族), 위글족, 회족(回族), 만족(滿族), 묘족(苗族)등 40개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기후    
아열대 계절풍 기후로서, 사계절이 분명하고, 기후는 온습하다.               
연평균 기온 → 16℃, 연평균 강수량 → 1,200㎜, 연무상기(무상기) → 약 230일
  

종교   
주로 불교, 도교, 이슬람교, 기독교, 천주교 이다.


문화
소주는 중화대지의 옥토로서 예로부터 경제가 번영하고 인문(人文)이 집결된 곳이었다. 지금의 우시엔(吳縣), 타이후(太湖), 삼산도(三山島)는 일찍이 만년 전에 이미 고기잡이와 채집으로 살아가는 선민(先民)들이 있었다. 상말주초(商末周初) 오(吳)문화의 명성이  점점 알려지게 되었고, 그 때 오(吳)나라에는 책과 예절을 중시하는 지식인들과 선진적인 군사사상도  나타났다고 한다. 그야말로 문무(文武)가 겸비하고, 강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어울려 있는 시대였다.
     
이때 오(吳)문화는 정교, 세밀, 개방의 전통적인 특성을 보유한 동시에 강하고, 무(武)를 숭배하였으며 역언(亦言)이 부(富)에 유리하다는 등 강한 개척심과 진취심이 있었다.  이 유구한 옛 도시는 사람이 걸출하고 토지가 영하여 역사명인들이 대대로 나타났다. 송조 때 전원(田園)시인 범성대(范成大), 명조의 저명화가 당백호(唐伯虎), 청조의 유명한 인사 장헌익(張獻翼), 근대의 민주혁명가, 사상가이며 저명한 학자인 장태염(章太炎)등의 옛집이 모두 소주에 있다.


역사
소주는 국가에서 지정한 24개 역사·문화의 명도시중 하나이다. 기원전 12세기 산시(陝西) 주(周)부락의 타이보(太伯), 종용(仲雍)이 자리 계승의 권력투쟁을 피하여 강남으로 먼길을 떠나 정착하게 된 곳이 바로 여기인데, 이때 그들은 황하 문화와 농경기술을 가지고 와서 당시 토목 주민들의 옹호와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녕.진(寧.鎭)지구에 "궈우(勾吳)"라는 부락이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오(吳)의 전신이다. 기원전 514년 오왕 합려(闔閭)가 왕위에 오른 후 오자서(俉子胥)에게 명하여 새로운 성을 짓게 하였으며, 수륙성문 8개를 만들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 나라의 초기 형태였다.
     
진시황때 군현제를 실시하면서부터 소주를 소현(蘇縣)이라 불렀다. 수문제가 진나라를 평정한 후 개황(開皇) 9년부터 다시 소주라 부리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1949년 우시엔(吳縣)지구를 수조우(蘇州)시라 하였으며, 현(縣), 시(市) 분리 관할제도를 실시하였다. 1953년 수조우(蘇州)시는 성(省)직할시가 되었고, 1983년 시(市)가 현(縣)을 관리하는 제도를 실시하여 우시엔(吳縣), 쿤산(昆山), 우장(吳江), 타이창(太倉), 창수(常熟), 장자강(張家江)의 6개시를 수조우(蘇州)에 속하게 하였다.


풍미의 음식(風味小吃)

위엔 즈 (圓子)
1) 주원료 : 깨끗한 돼지 고기, 양념으로는 잣, 찹쌀, 계란 노른자
2) 만드는 방법 : 고기와 잣을 갈아서 접시에 넣는다. 다음 계란과 양념을 고루 저은 다음 뜨거운 돼지고기 기름으로 튀긴다(절반만 익힘). 마지막으로 계란 흰자위국에 조미료를 넣어 고체상태로 만들면 된다.
3) 특징 : 금황색에 해바라기판 같은 모양이며 맛이 청(淸)하고 향기로우며 바삭바삭하고 만만하며 기름기가 된다.

민 빙(閔餠)
1) 주원료 : 쑥과 찹쌀
2) 만드는 방법 : 먼저 쑥을 갈아서 죽을 만든 후 찹쌀가루에 버무려서 피(皮)를 만들고 거기에 팥고물(豆沙)을 넣어서 찌면 된다.
3) 특징 : 청색을 띄며 윤기가나고 부드럽고 깨끗해 보이며, 입안에 들어가면 기름기가 있지만 물렁거리지 안는다. 맛이 청(淸)하며, 풍부한 비타민,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다.
    
마이야타빙(麥芽榻餠)
1) 주원료 : 청명절 전후에 싹튼 밀에 배합되는 재료는 쑥(紫艾頭), 스훼이빙(石灰屛)및 쌀
2) 만드는 방법 : 쌀가루와 밀 싹을 알맞게 배합한 다음 두 가지 야생식물 쑥과 스훼이빙(石灰屛) 잘 말려 익혀서 배합을 하여 쌀가루에 넣는다. 마지막에 팥고물(豆沙), 돼지고기기름, 복숭아씨 등을 넣어 평평한 모양으로 만든다. 그런 다음 쪄서 익히고, 그 뒤에 참기름을 발라 다시 굽고 식혀서 설탕물을 치면 된다.


토산품(土特産品)

비뤄춘(碧螺春) 차(茶)
이 차는 타이후(太湖) 동쪽 동팅산(洞庭山)의 비뤄(碧螺)봉에서 나기 때문에 비뤄춘(碧螺春)차라고 한다. 중국의 10대 명차(名茶)중의 하나이다. "향기로움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말도 있다. 옛날 캉시(康熙) 황제가 남쪽을 순찰할 때 이 차를 마셔 보고 차의 향이 순하다면서 공품(貢品)에 넣었다. 이 차를 따는 시기는 청명이 시작되어 곡우가 끝나기 전이며, 제일 끝머리의 연하고 뾰쪽한 가지의 잎을 딴다. 그 다음 차공의 손으로 반복적으로 비비고, 만지고, 닦아서 만드는데, 차 잎이 꼭 붙어서 감겨 마치 골뱅이와 같을 때가  가장 좋은 것이라 한다.  이 차는 물에 넣으면 물의 색이 청록색으로서 옥 같고, 색, 향, 맛, 모양이 제일이라고 한다.

바이사 피파(白沙枇杷)
동팅동산(洞庭東山)의 바이사(白沙)촌에서 나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 매년 5월 하순에 시장에 나오며 6월 초에 없어진다. 일반적으로 과일 색이 하얀 것과 연한 붉은 색인 것이 있다. 그 중에서 흰색이 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이것은 과일로 먹기도 하지만 약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폐(肺)를 윤활하게 해주고 기침을 멎게 하며, 청량제 역할과 해독작용을 한다. 피파를 잎과 과일 및 사탕가루를 혼합하여 끌이면 "피파가오(枇杷膏)"  "피파루(枇杷露)"가 되는데 이들은 기침을 멎게 하고 폐를 윤활하게 해주는 중약재이다.

동산 양메이(東山楊梅)
수조우(蘇州) 동정 동상(洞庭東山)에서 많이 나는데 일찍이 명조시대에 세상에 이름이 났다. 과일이 익는 시기는 5월이며 자색, 붉은 색, 흰색 등 3종류가 있는데, 제일 좋은 것은 붉은 색 과일이며, 그 다음은 자색, 흰색 순이다.  그 특징은 과일의 크기가 크고, 즙이 많고 달며, 맛이 향기롭다. 신선한 양메이를 먹기 전에 먼저 10%의 소금물에 몇 분간 담가 두었다가  먹는데 이렇게 하면 첫째는 살균작용을 하고, 둘째는 맛을 돋구어 준다.  양메이는 가래를 삭게 하고 기침을 멎게 하며, 음식의 소화를 도우며 술을 깨게 하는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오장(五臟)을 깨끗하게 하고, 폐를 통하게 해준다. 그 외 사탕 물에 담 그어 먹을 수도 있다.

타이창 로우송(太倉肉松)
타이창의 로우송은  금황색으로서 맛이 선선하고,부드럽고, 가늘고 길며, 입안에 들어가면 녹을 듯하여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이 요리는 신선한 돼지고기의 엉덩이 살을 원료로 하여 가늘게 썰고, 볶고, 삼고, 비비는 4개의 단계를 거쳐 만들어진다. 간장, 사탕가루, 생강, 회향, 황주를 원료로 하는 물에 넣고 먼저 강한 불로 삼는 다음 작은 불로 조절하여 삼고 마지막에 볶아서 말린 후 인공적으로 비벼서 가늘고 긴 모양으로 만들면 요리가 완성된다.

차이즈자이 사탕(采芝齋 沙糖)
차이즈자이가 유일하게 생산하는 중즈(棕子)사탕(沙糖)은 멀리까지 이름 나 있다. 수스(蘇式)사탕 중에서 제일 특색이 있고 제일 이름난 사탕이다. 수스 사탕은 중국의 전통적인 사탕으로서 판밍훠(分明貨), 차오훠(炒貨), 롼탕(軟糖), 탕궈(糖果)등 4가지의 특이한 맛으로 나눈다.  여기에는 150여 개의 품종이 있는데, 보허탕(薄荷糖), 송즈탕(松子糖). 종즈탕(棕子糖), 산서송즈롼탕(三色松子軟糖), 송즈난자오탕(松子南棗糖) 등 이있다.

지토우미(鷄頭米)
물위에 떠있는 수련과(睡蓮科)식물로서 종자가 치엔스(欠實)라해서 "치엔(欠)"이라고 하는데 보양식품으로 흰 참나무 버섯과 비슷하다.  먼저 뜨거운 물에 몇 시간 담근 후 너무 세지 않은 불로 삼는다. 그런 다음  대추, 연밥(蓮子), 계피(桂圓), 계화(桂花)와 배합하면 되는데 색과 맛이 매우 좋다. 이것은 한약재로 쓰기도 하는데 피로회복에 좋고, 척추와 무릎의 통증에 효험이 있고, 기를 돕고 의지를 강하게 하며, 맛을 돋구어 기를 보충하는 데 사용된다.

타이후인위(太湖銀魚)
태호의 3대 보배중의 하나로 불리우는 은어(銀魚)는 일찍이 춘추전국시대로부터 태호에서 났으며, 청조 강희 때에 나라의 공품(貢品)으로 정해졌다.  그 특징은 모양이 머리핀 같고, 색은 상아 같으며, 연한 뼈에 비늘이 없고, 고기질이 섬세하고 연하다. 신선한 맛에 풍부한 단백질, 지방, 철, 칼슘, 인등이 포함되어 있다. 볶아서 먹을 수도 있고, 튀기거나, 찌거나, 국을 해 먹어도 된다.

양청후 따시에 (陽澄湖 大蟹)
수조우(蘇州) 동북부의 양청후(陽澄湖)에서 나는데 9월에 자란다. 알이 딴딴하여 10월이면 수게가 성숙되며 시에까오(蟹膏;게의 지방성분)가 풍부하다.  이 게의 특징은 등은 청색이고, 배는 하얗고, 금색의 발에 황색의 털이 자라있으며 몸체가 크고 풍만하다. 자타가 공인하는 '게 중의 왕'으로 영양이 풍부하고 맛이 신선하다.

쟈위(甲魚)
자라인데 주좡(周庄)의 특산이다. 고기가 섬세하고 신선하며 풍부한 고단백질과 비타민이 포함되어 있다. 기(氣)를 돕고 항암작용을 한다. 일반적으로 찌거나 계란과 함께 국을 끓여 먹는다.옛날 비에(鱉)의 동음을 따서 '패왕별희(覇王別姬)'라고 부르는 명채(名菜)도 있다.


공예·미술

수 시우 (蘇 繡)
수조우(蘇州)수(繡)는 호남상수(湖南湘繡), 사천촉수(四川蜀繡), 광동월수(廣東奧繡)와 함께 중국 4대 명수(名繡)중의 하나이다. 26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바늘의 사용방법에 따라 9개 분류의 48종의 수가 있으며 색이 조화롭고 우아하다.  수의 소재는 사람, 산수, 꽃과 새, 동물 등이고, 보통 수편(繡片), 서화첩 (冊項), 주련(屛條; 4폭 또는 8폭으로 된 글이나 그림), 병풍(屛風)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 양면 수(兩面繡)가 제일 독특한 풍격(風格)이 있다.

커스( 革絲)
생사(生絲)를 경선으로 여러 가지 색실을 위선(緯線)으로 하여 만든 중국의 전통적인 방직공예품이다. 7세기에 이미 있었으며 명,청 때에 수조우(蘇州)의 공예품으로 되었다. 이것은 의자등받이나 양탄자 등의 고급일용품과 명인들의 그림을 따서 만든 공예품으로 분류된다.

수산 (蘇扇)
수조우 부채로는 접는 부채(折扇), 단향(檀香) 부채, 손수건 부채(絹宮扇)가 제일 유명하다. 접는 부채(折扇) "야산(雅扇)"이라고도 하는데 당조때 조선에서 들여온 거라고 한다.  저산(折扇)은 종이 사용이 매우 중요한데 반드시 고급종이를 붙여서 만들었으며, 그 위에 사람, 산수, 꽃, 새 등을 그려 넣었다.  부채의 뼈는 오목(烏木),종죽(棕竹)등을 사용하였다. 비싸고 유명한 부채는 상아나 자단(紫檀)을 재료로 쓴다. 부채 뼈는 일반적으로 단향목(檀香木)으로 만들며, 부채가 움직일 때마다 향기가 곳곳에 풍긴다.

허화우무커니엔화 (核花塢木刻年畵)
천진의 양류청(楊柳靑) 목각년화, 산동 유방양가부(維坊楊家埠) 목각년화와 함께 중국의 3대 목각년화(木刻年畵)로 불리 운다. 수조우 목각년화는 명나라 초기에 나타났는데 수조우의 타오화우(桃花塢) 거리의 작품으로 얻어진 것이다. 청조의 용쩡(雍正).치엔롱(乾隆)년간 성행했다가 양류청의 년화와 합쳐져서 "남쪽 복숭아 북쪽의 버들"이라 했다.  설계한 도안을 섬세하고 반듯한 배나무 판에 조각하는데, 매 색깔마다 하나의 배나무 판을 사용하였다. 년화의 주요형식은 심화(心畵), 중당(中堂), 병조(屛條)가 있으며, 마귀를 쫓는 신, 뛰는 고기와 용문(龍門), 재신(財神), 종규(鐘葵) 등이 있다.

수조우 후삐 (蘇州 湖筆)
청나라때 절강에서 전해왔는데 재료선택이 엄격하고, 공예가 정교하고 섬세하며, 종류가 다양하다. 양호(羊毫), 자호(紫毫), 랑호(狼毫), 계영(鷄穎), 산마(山馬) 6개류의 300여개의 품종이 있으며 "뾰쪽(尖)하고,가지런(齊)하며,둥글(圓)고,튼튼(健)한" 4대 특징이 있다.

송진 (宋錦)
윈진(云錦;南京), 수진(蜀錦;四川), 송진(宋錦;蘇州)을 3대 명 비단으로 불리고 있다. 송진은 공예(工藝)가 독특하며, 보통 따진(大錦), 허진(合錦), 샤오진(小錦)으로 나뉜다. 정교하고 색채가 우아하며, 평평하고 곧으며, 고색이 창연하다. 일반적으로 명화나 글을 싸거나, 고급 예물함 혹은 복장이나 옷깃에 쓴다.


민간 예술(民間 藝術)

수조우 핑탄 (蘇州 評彈)
당송시대에 이야기와 노래를 섞어 만든 이 음악예술은 소주방언으로 부르는 곡예(曲藝)이다. 평탄(評彈)은 총칭이고 평은 평화(評話), 탄(彈)은 탄사(彈詞) 이다. 주로 이야기와 표현으로 이루어지는데 말, 웃음, 연주,부르기 4가지형식이 있으며, 언어가 정연하고, 노래소리가 아름다우며, 말과 웃음이 감동을 주어 많은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수조우 쥐 (蘇州 劇)
수조우극은 희곡청창(戱曲淸唱)의 곡예로서 오(吳)노래의 청취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곡조가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내용이 완곡하고 감동적이다. 또한 강남 물의 고향의 깨끗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풍격을 지니고 있다.

우먼화파이(吳門畵派)
썬조우(沈周), 탕인(唐寅), 초우잉(仇英), 원즈밍(文徵明)이 선구자이다. 오파화가(吳派畵家)는 대부분 시,글쓰기에 능통하였고. 수림과 온천에 몸을 의지하고, 산수(山水)와 화조(花鳥)를 벗삼아 살았으며, 필묵이 청수하고 우아한 풍격이 있다.


민풍 민속 (民風 民俗)

칠석 치챠오(七夕乞巧)
음력 칠월 칠석날 밤에 부녀자들이 바느질을 잘하게 해 달라고 직녀성에 빌던 민간 풍속으로 부녀절(女兒節)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이 날밤에 직녀(織女; 베 짜는 여인)에게 제사를 지내며, 그녀에게 지혜(智慧)와 교예(巧藝)를 빈다. 그래서 "치 챠오(乞巧)"라 고도 부른다. 이 날은 가가호호 밀가루로 긴 사탕을 만든 후 길이를 약 2척 정도로 썰어서 기름에 튀긴다. 이 과자는 바삭바삭하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달다. 이것을 챠오궈(巧果)라 고도 하는데 치챠오(乞巧)날에 꼭 준비하는 공품(供品)이다.

용주 시합 (賽 龍舟)
매년 5월 단오날 동리(同里)마을에서는 용의 배  시합이 있는데, 마을의 용주는 머리가 없다. 용의 몸과 꼬리를 예쁘게 장식하고, 배 머리에 두 개의 큰 고무풍선을 걸고 양쪽 머리에는 비단으로 채색기를 만들어 단다. 배의 중심에 발판을 만들고,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쳐 돛을 만든다. 이 용주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동리사람들은 "쾌속선" (快船)이라고도 한다.   

책 말리며 경 뒤집기 (曝書飜經)
음력 6월6일에 수조우(蘇州)에서는 책 말리는 습관이 있다. 이 날이 되면 각 사원(寺院)에서는 경서를 꺼내다가 밖에서 말린다. 스님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마을의 부녀자들을 모집하여 "경 뒤집기 회(飜經會)"를 한다. 그들은 따가운 땡볕 아래서 경을 말린다. 그래서 "경(經)을 10번 뒤집으면 내세(來世)에 남자로 변한다"고도 한다.

신선 사귀기(軋神仙)
4월14일은 8신선 중의 뤼동빈(呂洞賓)의 출생일이라고 하는데 이 날을 "신선의 생일"이라 하였다. 14일이면 신선을 향해 비는 사람들이 끊을 새가 없다. 특히 기생집, 의사, 약 등의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더욱 광열적이다. 왜냐하면 이 날이면 뤼동빈(呂洞賓)이 사람들 속에 들어와 떨어지지 않은 병을 치료한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특별히 많고 붐비며, 모두들 신선의 은혜를 입고 싶어 한다. 때문에 "까선시엔(軋神仙)"이라고 한다.

물 마을의 의복 (水鄕服飾)
즈전(直鎭)농촌 부녀자들의 옷은 매우 독특하다. 그들은 머리를 빗어 머리수건으로 동이고, 이어 만든 옷과 바지를 입으며,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다. 팔에는 팔토시를 끼고, 수(繡)가 놓인 신을 신고 있다. 그래서  "수조우 소수 민족(蘇州少數民族)"이라는 말도 있다.

석호 달 구경 (石湖患月)
음력8월18일 수조우(蘇州)에는 배를 타고 석호의 달을 구경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석호의 달 구경" 또는 "석호의 유람" 이라고도 한다. 석호는 성(省)서남쪽에 있으며, 밝은 달빛아래서 탑 그림자가 다리 위에 비치고 돛배가 바람에 의해 나아가는 풍경이 아름다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한다. 깊은 밤 달빛이 석호를 비추면 거꾸로 비낀 그림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곧 이어 크고 작은 배가 나타나며 호수에는 노래소리와  악기소리가 들끓어 오른다.

개황

1. 명 칭
1) 중국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
2) 별 칭 : 오(吳)

2. 행정 구분
1) 市는 4개 행정구(行政區: 시 중심 구분)와 1개 현(縣:시 관할 교외지역에 대한 구분), 5개 소속시로 구분되어 있다.
2) 중국의 14개 연안 개방도시중의 하나임.

3. 면적/인구                                       
1) 면  적 : 市 전체 8,488㎢         市中心 행정구 178㎢    
2) 인  구 : 市 전체 571만명         市中心 행정구 105만명     

4. 지리적 위치
1) 중국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장강(長江)의 하류를 북으로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상해, 서쪽으로는 남경, 남쪽으로 항주(杭州)에 맞닿아 있다
2) 동경 120도 북위 31도에 위치한 소주는 연중 강우량 1200mm, 일조량 년2000시간 이상으로 농경에 적합한 기후조건을 구비하고 있으며, 중국 최대의 곡창지대로 예로부터 "蘇湖熟, 天下足 (소주와 절강성 호주의 곡식이 익으면 천하가 풍족 하여진다)"라는 말이 있었다.
3) 소주는 강소(江蘇)평야에 위치하고 대운하(大運河)의 길목으로서 예로부터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문화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 왔으며, 현재는 경제개발지구를 조성, 해외자본 유치에 적극적이다.

5. 소주의 약칭(略稱)에 대한 이야기
1) 오(吳)라는 명칭은 중국 고대의 주(周)왕조 초기에 이곳에 오국(吳國)을 설치한 것이 유래가 되고 있다.

6. 산업
1) 소주는 경공업중심의 산업이 발달해 있으며, 비단, 공예, 전자, 화학,기계 및 건축자재를 위주로 발전되어 있다. 소주인들은 비교적 섬세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소주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많은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한다.
2) 공업기업 : 2만여개 (해외합작기업 8천개 포함)
3) 총생산액 : 1996년 총 생산액 1000억 RMB(U$125억)로 전국에서 상해, 북경, 천진에 이어 4위를 차지하였다.
4) 싱가폴 공업구
- 총면적 : 214㎢
- 예상투자금액 : U$ 300억
- 투자주체 : 중국정부와 싱가폴 정부, 그리고 다국적 기업 다수 참여
- 공업구개발시기 : 1994년 2월 26일 중국,싱가폴 정부의 정식 계약으로 개발  정식 착수
- 목적 : 소주에 싱가폴의 경험을 거울로 삼아서 최첨단 수준의 HIGH-TECH 기술단지를 만든다.
- 공업구 입주기업 :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HITACHI 반도체 공장, 국제학교, 로렐 화장품등이 이곳 에 첨단 공장을 세워 가동중에 있다.
5) 소주신구(蘇州新區)
- 위치 : 소주시 서부에 위치
- 개발목적 : 장강유역의 교통, 문화중심지인 소주에 최신과학기술개발구를 운영하여 선진기술과 자본을 유치, 국가발전에 기여하기 위함.
- 면적 : 52㎢
- 개발시기 : 1990년 시작
- 투자기업 : 30여개국 300여 기업이 투자, 공장 및 기업 (MATSUSHITA, SONY,후지필림, 필립스등 다국적 기업)을 경영중임.
- 투자항목 : 전자통신, 유전공학, 신소재, 자동차 부품등 첨단산업
 
7. 교통
전국을 잇는 9개 철도망 및 남경-상해간을 잇는 고속도로와 연결되며, 그 외에 장강과 대운하의 수로를 통해 항주로도 연결된다.

8. 특산물
1) 음식
소주는 온난한 기후에 많은 곡식들을 수확할 수 있는 자연환경으로 인해 진시황때부터 청나라때까지 계속 궁중음식의 재료를 제공하는 지방이었다. 현재 소주요리는 중국 4대요리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 특징은 재료의 엄선과 세심한 요리의 손질로 맛과 멋과 향을 동시에 낼 수 있고, 장강의 물고기와 강소평야의 채소류를 멋지게 조합해 "느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은" 소주요리 고유의 영역을 구축하였다. 대표적인 요리로는 "호수에 사는 민물게" 등이 있다.
2) 비단
소주의 비단은 예로부터 중국내에서 "실크의 고향"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역대 왕조에 매년 비단을 진상하는 등 전통적인 비단가공 산업이 발달해 왔다.

9. 기후
남경이나 상해와 마찬가지로 겨울철에는 영하 3℃까지 내려가고, 여름철은 최고 영상 35℃까지 올라가는 겨울과 여름이 분명한 아열대 기후다.

10. 소주사람의 기질
1) 소주사람들은 남방인의 섬세함을 특징으로 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성격은 북방사람들에게 "小氣-속이 좁다"라고 멸시당하기도 하지만 상업방면과 생산가공 기술에서 도리어 장점이 되고 있기도 하다.
2) 음주습관 : 소주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며, 대신 차를 많이 즐긴다.

11. 소주의 방언(方言)
소주의 언어는 중국 표준어인 보통어 외에 중국의 방언군으로 분류되는 자체 방언이 있다. 외국인들이 듣기에는 상해방언과도 비슷하나, 소주사람과 상해사람이 자기지방의 방언으로 이야기하면 서로 못알아들을 정도로 다르다.  


소주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  

1. 소주의 형성
소주는 6천년전부터 원시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전설에 나오는 우왕(禹王)이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천하를 9개주(九州)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소주는 옛날 양주(古揚州)에 속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와서 소주는 오월동주와 와신상담의 고사성어의 유래인 오나라(吳國)의 도성이 되며, B.C.473년에 월나라(越國) 속하게 되고, 다시 초나라(楚國)에 합병된다.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후에 삼국시대 오나라가 잠시 소주에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소주라는 명칭은 수나라때 개칭한 것이다. 삼국시대이후 소주는 한 나라의 도성이 되지는 못했으나 장강유역의 주요 교통중심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2. 춘추시대 오나라의 성립
고대 주나라 왕조의 시조인 무왕(武王)이 商나라를 멸망시킨 후 자신의 다섯 번째 아들을 소주에 보내어 오나라의 왕(B.C.770년)으로 봉하였다.  오나라는 그후 B.C.585년 국력이 강해진 오나라는 서쪽에 인접하고 있던 강국 초나라(楚國)을 침략하는 등 춘추시대 후기에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3. 오자서(伍子胥)와 吳越전쟁
오나라를 흥성하게 만든 왕의 이름은 수몽(壽夢)인데 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막내아들인 계찰(季札)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으나 그가 왕위를 사양하자 할 수 없이 장손인 제번(諸樊)부터 여제(余祭), 여매(余昧)등 형제순으로 왕위를 이어가게 되었다. 후에 3째인 여매가 임종시 또다시 자신의 동생인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으나, 이번에도 왕에 미련이 없었던 계찰을 아예 다른나라로 도망을 가버렸고 어쩔수 없이 왕위는 여매의 아들인 료(僚)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러나 본래 장자세습제로 따지면 여매의 큰형님인 제번의 아들인 광(光)에게 돌아가야 했으며 이에 불만을 품은 광은 자신의 참모인 오자서와 모의하여 사촌동생인 료를 살해하고 오나라 왕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오왕 합려(闔閭)이다. 합려가 왕위에 오른 해(B.C.514년)에 오자서는 합려에게 성을 건축할 것을 건의하니, 이것이 바로 소주에 최초로 만들어진 소주성(蘇州省)으로 이미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합려는 부국강병을 꾀하였고, 유명한 군사전략가인 손무(孫武 -손자병법의 저자)를 초빙하는데 성공, 마침내 B.C. 506년 오자서와 손무를 대장으로 삼아 서쪽의 초나라를 침공, 그 수도까지 함락시켜 국력의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오나라가 초나라를 격파할 당시, 남쪽의 월나라(지금의 절강성 항주에 도읍지를 둔 나라)도 점차 강력해져서 역사에 유명한 오월쟁패(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B.C. 496년 월나라왕 윤상(允常)이 세상을 떠나 아들 구천(勾踐)이 왕위를 승계한다. 오왕 합려는 이 기회를 이용, 월나라를 공격하나 월왕 구천은 지금의 상해 서남부 지역에서 오나라 군대를 대패시킨다. 이 전투에서 오왕 합려는 부상을 입고 세상을 떠나게 되어 지금 소주의 서북쪽 호구(虎丘)에 묻힌다. 오왕 합려의 사망으로 아들 부차(夫差)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강병을 육성하여 다시금 월나라를 침공(B.C. 494년)한다. 이때 월나라는 수도까지 함락당하였고,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范黎)의 계책을 이용, 오나라에 화평을 제의하였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구천을 지금 죽이지 못하면 나중에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충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드려 구천을 소주성에 데려와 구금한다. 월왕 구천은 3년간의 갖은 수모끝에 다시 월나라에 돌아오게 된다. 오왕 부차는 전쟁에서 승리후 자만에 빠져서 사치향락에 탐닉하게 되고, 오자서의 간언은 듣지 않고 간신의 아첨과 모략에 빠져서 마침내 공신 오자서를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소주성 주변에 궁전과 누각을 지어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한다. 게다가 여러차례 군사를 일으켜 중원의 강대국인 진(晋), 제(齊)나라와 전쟁을 하지만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여 군사력마저 점차 쇠약해졌다.

※ 와신상담(臥薪嘗膽)
오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돌아온 월왕 구천은 패전의 치욕을 새기고, 복수의 마음을 다지기 위해 매일 마른 장작더미위에서 자고(와신), 매일 동물 쓸개의 쓴 맛을 보는(상담) 노력으로 국력을 착실히 재건하고 있었다. B.C. 482년 오왕 부차가 군대를 인솔하고 전국 제후회의에 참석, 전국시대의 패권국의 위치를 차지하고자 중원에 간 틈을 타서 월나라 군대는 오나라를 기습한다. 부차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회군하여 월나라에 평화회담을 제의한다. 이때 이후로 오나라의 국력은 더욱 쇠퇴하였으며, 월나라는 B.C.473년 재차 오나라를 침공하게 되고, 오왕이 소주성 외곽까지 퇴각, 자결함으로써 전국시대의 오나라는 월나라에 멸망하게 된다.

※ 서시(西施)와 범려(范黎) 
중국의 4대 미인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은
“越나라의 서시, 唐 현종의 양귀비,漢나라에 흉노에 시집간 왕소군, 패왕별희의 주인공 우미인”을 들 수 있는데, 그중에 서시가 바로 오월 전쟁사의 보이지 않는 조역으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서시는 월나라 항주사람으로 어릴적부터 아름다왔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남자들이 모두 서시만을 좋아하므로, 서시의 미모에 뒤쳐진 뭇 여자들은 서시가 하는 행동대로 하면 남자들이 자기들을 좋아할 줄 알고 따라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서시는 어릴적부터 심장이 좋지 않아서 가끔 얼굴을 찡그리는 표정을 지었는데, 아름다운 얼굴은 인상을 찡그려도 아름답지만 못생긴 여자가 얼굴을 찡그리면 얼마나 추악한 모습이 되겠는가. 하지만 그것도 모른채 동네 여자들은 모두 서시마냥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고 동네 남자들이 어이가 없어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이렇게 아름다운 서시는 월왕 구천이 오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자 이를 구하기 위한 참모 범려의 “미인계”에 따라 오왕 합려에 바쳐진다. 오왕 합려는 월왕 구천이 서시와 같은 천하에 제일가는 미인을 바치자 구천의 충성스러움을 믿고서 구천을 자기나라로 돌려보내는 실책을 범한다. 그후 서시와의 향락에 탐닉한 합려는 정사를 돌볼 겨를이 없었고, 결국 월나라에 대패하여 자살하고 만다. 비록 월왕 구천을 구하기 위해 오왕 합려에 바쳐져 현대의 여간첩 역할을 한 서시지만 정작 그녀가 사랑하였던 사람은 범려였다고 한다. 월나라가 오나라를 정복한 후, 월왕 구천 역시 서시를 찾았지만, 그녀는 범려와 함께 소주 서쪽의 태호(太湖)옆에 정원을 짓고 행복하게 남은 여생을 누렸다고 한다.

4. 항우와 패왕별희
진시황이 초나라를 멸망시키자 초나라의 귀족 출신이었던 항우와 그의 삼촌 항량은 소주성으로 피난을 와서 암암리에 인재를 모으고, 무술연마를 하고 있었다. 그 후 진시황이 죽고, 진승.오광의 농민반란이 일어나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항우는 소주에서 사람을 모아 초나라의 부흥을 꾀하게 된다. 이때 항우를 따라 나선 소주의 청년들이 8천명으로 이들을  일컬어 “江東의 8천명의 청년병사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항우를 따라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유방에게 패해 회수 (淮水) - 장강북쪽을 흐르는 강-를 등지고 한나라 병사들에게 포위되었고 항우에게 "지금이라도 강을 건너 재건을 꾀하자"는 간언을 한다. 그러나 항우는 "내가 회수를 건널때 나를 따라 왔던 강동의 8천명 병사들이 거의 다 죽고 없는데, 지금 이대로 돌아가면 그 부모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우미인’을 자결시키고 자신도 자살한다. 이것이 유명한 "패왕별희"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5. 손권과 소주
한나라 말년에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각 지방의 관리들과 지방토호들이 군사력을 갖추게 되어 군웅할거 시대를 형성하였다.  이때 소주의 손견(孫堅)역시 군벌들의 세력분할 과정에서 성장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 아들 손책(孫策)이 강동(江東)일대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는 자객을 만나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삼국지의 오나라 황제가 된 손권이 강동의 패권을 쥐게 된다. 그는 풍부한 경제적 조건과 장강에서 훈련된 강력한 수군을 육성하여 마침내 적벽대전의 승리를 쟁취한다. 손권은 또한 중원의 뛰어난 경작기술을 받아들이고, 남부 지역을 정복하여 산속에 살던 사람들을 강제로 평야에 거주케 하여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 부국강병의 기초로 삼았다. 따라서, 장강 이남지방의 농업개발을 처음으로 시작하여 그후 남북조 시대 남조가 경제적으로 풍요하게 된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졸정원(拙政園)
 
1. 위치 : 소주시 동북쪽에 있다.

2. 축조시기 : 명대에 건축을 시작하였으며, 청나라초엽에 걸쳐 증축, 개수하였다.

3. 구조
1) 졸정원의 배치는 물(水)을 중심으로하여 정원복도와 호수를 건너는 다리를 주(主)로, 각 정자와 대청을 부(副)로 하여 지은 것이다.

2) 배치
 정원은 東,中,西의 세부분으로 나뉘며 서쪽의 부분은 증축한 것으로 원래 없었던 부분이다. 동쪽 부분에 입출구가 있으며 입구에는 “勝入”, 출구에는 “幽通”라고 새겨져 있다. 즉 정원내부를 들어갈 적에는 보고싶은 마음에 기대를 하고 들어가며, 정원을 보고서는 그 아름다움에 숙연해져서 나간다는 집주인의 생각을 적어놓았다.

- 포지(鋪地) : 지금의 보도블럭
정원입구를 들어서면 마당이 나오고, 마당에 나 있는 자갈길을 따라 지나게 되는 데, 이 자갈길도 하나하나 모양을 내어 당시에 인부들이 하나하나 모두 박아 만들었다고 한다.

- 태호석(太湖石)
길이나 호수를 지나가다가 보면, 곳곳에 기암괴석이 있으며, 이것은 소주근처의 태호(커다란 호수라는 뜻)에서 채취한 돌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돌의 모양이 기기묘묘하게 생겨서 태호석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정원 장식에서 빠질 수 없는 자연물이다.

- 연못
졸정원은 원래 평지였으나, 왕헌석이 돈을 들여서 연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그 안에 잉어를 길렀다고 한다. 그 잉어들은 지금도 많이 볼 수 있으며, 크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여름에는 연못에 연꽃들이 활짝 피며, 봄, 가을, 겨울에는 연못 주변의 정자와 인공산들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쳐서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 가산(假山) - 인공산
소주의 정원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가산으로, 건축자는 자신의 정원안에 세상(자연)을 모두 가지고 싶어 했으므로, 대청 앞에 인공산을 쌓아서 거기에 정자를 올려 경치를 즐겼다. 졸정원의 가산은 연못을 파고서 나온 흙과 태호석을 가지고 만든 독특한 모양이다.

- 화조(花鳥)
중국인들의 꽃과 새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다. 정원에 새의 지저귀는 소리(聽)와 아름다운 꽃(視)을 기르면서 심신을 다스렸으며, 장수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 복도
정원의 복도는 연못을 따라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에서 중앙으로 들어가는 복도 중간에서 연못을 향해 보면, 소주의 북사탑이 마치 정원안에 있는 듯이 보인다. 복도에는 동쪽으로 창이 나 있으며, 각 창의 모양이 다르게 설계되어 독특함이 있다.

- 정자
복도를 따라가면 이름없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호수쪽으로 나 있는 창을 보면 가을이 보이고, 오른쪽의 대나무가 여름, 복도쪽의 흰색은 겨울, 좌측의 꽃나무가 봄을 연상케 한다.

- 다리
졸정원의 다리는 모두 꺾어진 모양이다. 여기에는 전해내려 오는 말이 있는데, 집주인 왕헌석이 정원을 지을 때 귀신들이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정원에 내려와 출몰할 것을 염려한 그는 귀신이 다리를 지나 중앙대청쪽으로 오지 못하게 다리를 꺾은 모양으로(중국 귀신들은 강시 영화에서 보듯이 직선으로만 다닌다) 설계하였다고 한다.

- 정자(雪香雲尉)
다리를 건너면 산 위에 정자가 있는데, 여기에 올라가면 정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집주인은 여기에서 손님을 모시고 차를 마시면서 정원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고 한다.  

- 정자(荷風四面)
사방에 연꽃의 향기가 난다는 정자의 이름처럼 3면이 연못으로 되어있고, 대나무와 함께 졸정원을 구성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무의 하나인 버드나무와 가산을 모두 볼 수 있다.

- 건물(旱船)
배의 앞머리와 같이 만든 건물로, 집주인이 연못을 만든 다음 연못에 배를 띄워 놀고 싶었으나 연못이 너무 작아서 안되자, 대신에 배와 같이 생긴 건물을 만들어 그 기분을 내었다고 한다. 그 지붕을 계속 따라가 보면 그 모습이 마치 용의 등과 같이 생겼다. 왕헌석이 이 집을 지을 때는 이미 퇴직하여 아무것도 거리낌이 없었고, 생전에 해보지 못한 것은 오직 황제의 자리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복도와 건물의 모양을 용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어서 황제가 되지 못한 한을 이러한 방법으로 풀었다고 한다.

- 백목향(栢木香)나무
나무는 100여년이 된 것이나, 나무 주위에는 작은 자갈들이 원형으로 촘촘히 박혀 있다. 왕헌석은 여기서 매일 3번씩 맨발로 나무의 주위를 10번씩 돌았는데, 이 작은 자갈이 지압 역할을 하고, 10번씩 돈 것은 100살까지 살고 싶은 그의 바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 분재(盆栽)
정원의 서쪽에 있으며, 중국 분재의 특징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의 분재는 한국의 분재와는 달리 크기가 크고, 태호석을 조화시켜서 하나의 풍경화를 만들어 낸다.

- 원앙관(鴛鴦館)
이곳은 부부가 36마리의 원앙새를 기르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곳으로 부부만의 공간이었다. 여기는 창유리가 파란 색으로 되어 있는데, 북경에서 관리를 하면서 겨울이면 눈을 보던 왕헌석은 강남에 내려와 눈을 보기 힘들게 되자 파란 색의 창유리를 달아서 그 창을 통해 눈이 내린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만들었다.

- 원향당(遠香堂)
손님을 맞이하는 대청으로 이곳에서 정원의 가산, 대나무, 연못을 모두 볼 수 있다. 왕헌석은 이곳에 홍목(紅木-물에 가라앉는다는 유명한 가구 재목)으로 의자를 만들고, 의자 등걸이를 대리석으로 하는 등 자신의 재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 태호석
정원을 빠져나가는 곳에 두개의 커다란 태호석이 있는데, 우측은 남자 좌측은 여자가 변한 것이라고 한다. 올려다 보면, 그 모양이 남자쪽은 아무런 풀도 나 있지 않고, 여자쪽은 마치 긴 머리를 기른 듯이 풀이 무성하게 나 있다.

4. 관련된 이야기

1) 졸정원은 중국 4대 정원-소주의 졸정원, 유원(留園),북경의 이화원,승덕의 피서산장-중의 하나이며, 소박한 멋을 지니고 있는 정원이다.

2) 졸정원은 명대 어사 왕헌신(王獻臣)이 말년에 관직에서 은퇴하여 지은 것인데, 정원을 지은 후 안에 들어가 보니 마치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져서 "차라리 정치를 하지 말고 일찍 여기에서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와서 생각하니 정치하는 사람들은 매우 머리가 나쁜(拙政) 사람들이구나"라는 생각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왕헌신에게는 망나니 외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은 공부는 하지 않고 주색잡기를 밥먹듯 했다고 한다. 어느날 왕헌신이 현묘관(玄妙觀) - 도교의 사찰로 현재 소주시 중심가에 위치 - 앞에서 점괘를 보았는데, 점쟁이가 뽑으라고 내어 놓은 산괘중에서 왕헌신이 뽑은 것이 바로 “졸(拙)”자였다. 그 점쟁이는 왕헌신에게 해석해 주기를 "이 글자는 손(手)을 흔들면 모두 빠져나가게 (出)된다" 라고 알려 주었다. 원래 이 점쟁이는 왕헌신이 병 때문에 근심하여 온 줄로 알고서 “손을 흔들면 병이 낫게 된다”고 이야기 한 것이었는데 왕헌신은 본래 자기가 지은 졸정원이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손대대로 자기 집안의 정원으로 남을 수 있는가를 물으러 온 것이었다. 그런데 점쟁이가 “손을 흔들면 빠져나간다(잃는다)”라고 해석을 해주니 기대와는 반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왕헌신이 죽자 그나마 훈계하던 아버지가 없어진 외아들은 제 세상을 만난듯이 매일 도박과 음주를 일삼았다. 어느날 졸정원을보고 있던 외아들은 졸정원이 너무 작아서 답답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들여 정원밖 서편의대지를 사들여서 추가로 확장공사를 했고 새로 확장한 정원 호수위에 큰 대청을 지은후에야 만족해 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돈도 도박에는 당하지 못하는 법, 마침내 어느날 호화 도박판에서 하룻밤만에 졸정원을 잃고 알거지가 되고 만다.


소주의 정원문화

1. 정원문화의 발달

1) 소주는 “동방의 베니스”라고 불리우듯이 물이 풍부하고, 정원이 발달해 있다. 소주정원문화의 발달은 강남(江南)의 본격적인 농업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경제적으로 풍요해진 귀족들이 자신의 재력에 대한 자랑과 자연과 쉽게 접하려는 욕망이 정원문화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2) 따라서 남북조시대 이전에 탑, 정자, 대청,저택과 같이 독립된 건축양식에 불과하였던 건축양식이 경제발전과 평화시대의 지속에 힘입어 정원이라는 복합건축문화를 이루게 된다. 소주의 정원은 송나라 이후에 더욱 발전하여 명나라와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2. 소주정원문화의 배경

1) 소주는 수로가 잘 발달되어 물을 쉽게 끌어다 쓸 수 있었고, 전국시대부터 건축기술이 발달하였으며, 태호석이라는 정원의 장식에 안성마춤인 재료와 대나무가 자랄 수 있는 자연환경 등이 정원문화를 꽃피우게 된 배경이다.
2) 소주는 또한 문화의 중심지로 전란의 피해를 그렇게 입지 않았고, 전쟁을 치른다고 할 지라도 정복자가 소주정원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곳에 살고 싶어하였으므로 대부분의 정원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많은 중국사람들은 “강남(江南)의 정원은 천하에서 제일가며, 그중에서도 소주의 정원이 최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3) 소주의 정원은 명대(明代)것이 272개, 청대(淸代)것이 130개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정원은 69개가 남아 있음.

소주의 기타 유적지

1. 북사탑(北寺塔)

1) 명칭
일명 북탑으로 불리는데, 원래 명칭은 보은사탑(報恩寺塔)이었다.

2) 유래
삼국시대 손권의 어머니인 오부인(吳夫人)이 지은 것이며, 현존건물은 남송시대에 재건한 것이고 1967년 전면 수리를 하였다.

3) 구조
탑의 높이는 9층(74m)이며, 탑의 여덟면이 나무기와로 이루어진 누각형식이다. 탑의 기초는 900㎡로 소주의 탑중에서는 제일의 규모이다.

4) 관련 전설    
탑의 꼭대기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표주박(약 2톤 무게)이 있는데,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낸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손권은 어머니께 효도했는데, 이 탑을 짓기 위해 특별히 제갈공명을 초청하여 설계를 돕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당시 제갈공명은 유비를 도와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으므로, 당연히 손권을 도와줄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오나라를 골탕먹일 생각에 일부러 어려운 주문-다른 탑보다 높게 9층으로 짓고 탑의 층마다 처마를 길게 만들고 탑의 꼭대기에는 무거운 청동 주조물(표주박 모양)을 얹도록 하였다. 설계주문을 받은 손권은 한편으로는 난감하면서도 화가 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갈공명을 초청하여 탑을 만든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고, 제갈공명이 오나라의 건축기술을 시험해 본다는 생각도 들어 탑의 건설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오나라 최고의 장인을 불러 탑을 세우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기술이라는 것이 청동 주조물을 만든다고 해도 가장 무겁게 만들 수 있는 것이 5kg정도인데 2톤무게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였다. 이 표주박을 만들기 위해 꼬박 하룻동안 불을 지피는 연기가 십리까지 퍼졌다고 한다. 그런데 표주박의 주조를 개시한 후 얼마안되어 청동이 1근정도 모자랐다. 이를 들은 장인은 생각끝에 자기의 백동팔찌를 벗어서 화로에 던졌고, 이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소주성 백성들이 모두 이를 따라 자발적으로 청동팔찌를 헌납하니 모자란 청동은 금방 보충되었고, 마침내 2톤 무게의 청동주조물이 만들어졌다. 청동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손권은 무척 기뻐하면서 제갈량에게 이를 알렸으며, 제갈량은 오나라에 재주있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서 다시는 오나라를 깔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2톤의 청동표주박을 어떻게 탑위에 세울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를 고심하던 장인은 “탑 1층을 쌓으면 흙으로 그 1층을 메워 나중에 그 흙을 허물기만 하면 해결된다“는 해답을 찾아내었다. 탑이 완성된 날, 보이는 것은 높은 흙탑이었고, 다시 그 흙을 정성들여 떼어내자 과연 설계에 한치의 오차도 없는 북탑의 장엄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2. 호구(虎丘)

1) 위치 : 소주시 북서쪽에 위치한 동산

2) 유적지
- 전국시대 오왕 합려의 무덤    
- 시검석(試劍石)
중국 역대의 수많은 보검은 중국 장인들의 주조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호구 정상 옆에 반으로 잘라진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시검석 이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오나라 왕 합려는 천하를 제패할 욕심에 이곳에 많은 보검 제조장인들을 불러모아 그들이 만든 검을 시험해 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검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월나라에는 구야자(歐冶子)라는 명인이 있어서 그가 만드는 검은 돌을 두부처럼 자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소주성내에 간장(干將)이라고 하는 보검제조자가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보검을 만들 수 있다는 소식이 합려에게 전해졌다. 간장을 불러온 합려는 그에게 가장 좋은 보검을 만들것을 명령하면서 3백명의 동남동녀를 검의 제조를 위한 제사에 제물로 쓰고자 하였다. 그러나 간장은 100일내에 보검 제조를 약속하면서 3백명의 제물은 필요하지 않다고 그들을 풀어주도록 합려에게 간청한다. 간장은 전국각지의 가장 좋은 원료를 모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당대최고의 보검을 만들어 낸다.  이 보검은 차갑기가 물과 같고, 보름달이면 용의 울음소리를 내는 세상에 보기드문 병기였다. 그러나 간장은 보검을 완성한 후에도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합려의 인간성으로 볼 때, 이런 보검이 또다시 만들어 지는것을 원치 않을 것이므로 간장을 죽일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간장은 또 한자루의 보검을 만들었으며, 처음에 만든검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간장”, 두번째 만든 보검의 이름은 자신의 부인이름을 따서 “막야”라고 하였다. 백일의 기한이 되어 간장은 오왕 합려에게 막야검을 바친다. 그때 마침 호구를 걷고 있던 합려는 기뻐하면서 그 칼로 옆에 있는 큰 돌을 치니, 돌은 두쪽이 났고 보검은 하나의 흠집도 없이 완전무결 하였다. 만족한 오왕은 후에 간장이 생각한 대로 보검이 또다시 세상에 만들어지지 않게 간장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간장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부인 막야에게 자신의 또다른 보검인 “간장검”을 가지고 도망치도록 했고, 부인의 뱃속에는 마침 임신중인 아이가 있었다. 결국 간장은 합려에게 살해당했다. 18년이 지난 후, 오왕은 어느 청년이 보검을 바치러 왔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보검과 비교하기 위해 궁궐로 그를 부른다. 그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보검이 든 목합을 바친다. 오왕이 그 목합위를 보니 “대왕에게 보검을 바친다”라고 적혀 있었다. 합려가 이 글을 읽는 순간 청년은 목합에서 보검을 빼내어 합려의 목을 베어 버린다. 그와 함께 합려가 항상 차고 있던 막야검이 스스로 날기 시작했다. 궁궐의 호위무사들이 그 청년을 잡으려고 했으나, 청년이 차고 있던 간장검과  막야검은 각각 청룡(靑龍)과 적룡(赤龍)으로 변했고 있었고, 청년은 청룡을 타고 하늘로 날라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 호구의 사탑(斜塔)-기울어진 탑
호구의 정상에는 기울어진 탑이 있다. 이 탑은 소주시 근처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어서, 소주시내의 북사탑과 함께 소주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탑의 높이는 47.3m, 모두 7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면 8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벽돌로 만들어진 탑이다. 소주사람들은 이 탑을 “동방의 피사의 사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탑이 기울어진 이유는 1천년의 세월동안 풍화와 침식 때문이었다. 전문가의 이야기로는 탑의 무게가 6천톤 정도인데 기초를 다질 때 흙으로 다진 부분이 너무 얇아서 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졌다고 한다. 사탑을 만들었을 때에 전해지는 전설이 있는데, 오왕 합려가 죽어서 호구에 묻힐 때, 3천자루의 보검을 함께 묻었다고 한다. 합려의 장례식이 끝난지 며칠 되지 않아 합려의 무덤에 이마가 하얀 호랑이가 나타났다가 얼마되지 안아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들은 오왕 부차는 무슨 징조인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다. 한 신하가 대답하기를“호랑이는 산중의 왕이므로, 천하를 제패한다는 길조입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얼마있지 않아서 사라졌으니, 이것이 걱정됩니다 “.  오왕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신하는 “호구가 원래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다만 꼬리모양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꼬리모양의 탑을 만들면 길함이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오왕이 탑의 건설을 지시했다고 한다.


중국의 대운하(大運河)

1. 개요
1) 북쪽의 북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소주 서쪽의 양주(揚州)를 거쳐 남쪽 절강성의 항주(杭州)까지 총 2000㎞의 길이를 자랑한다.
2) 운하는 총 北, 中, 南의 세부분으로 크게 나누며 中段을 上,下段으로 다시 나눈다.

2. 北段
수양제때 시공, 낙양의 하천인 洛水를 북쪽으로 끌어올리고, 慶水(하천의 명칭)를 황하까지 끌어옴

3. 中上段
낙양에서 시작하여 강소성 북부의 회하(淮河)까지 연결시킴

4. 中下段
춘추시대 오나라왕 부차가 회하와 揚州(장강북부의 도시)를 연결시켰다

5. 南段
수양제때 장강남단의 진강(鎭江 - 소주와 남경 사이의 도시)을 경유, 절강성 항주 까지 연결시킴

6. 의의
남북 대운하의 개통으로 海河, 黃河, 淮河, 長江, 錢塘江등 중국의 5대 수계(水系)를 연결하여 남북의 경제, 문화교류를 촉진시킴

7. 목적
1) 수양제때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물자 및 병력 수송을 위한 것이다.
2) 황제의 남부시찰때 호화 유람선을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8. 영향
1) 수양제는 무리한 대운하건설과 고구려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왕조가 몰락하는 결과를 맞았지만, 그가 이룩하여 놓은 대운하는 남북의 교통, 운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와서 본격적인 중국 발전의 기초가 된다
2) 대운하는 현재에 와서 육지 교통의 발달로 그 중요성이 많이 하락하였으나, 남북물류의 동맥으로 여전히 그 역할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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